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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3X3=33​ 포스코갤러리

"3x3=33 (重重無盡)"

3X3 은 현실 세계며 33은 유토피아의 세계를... 3x3은 아나로그를 33은 디지탈세계를...
33개는 천상과 맞닿는 동양사고에서의 상징숫자이며 3x3=9에서 9는 구천임과 동시에 현상세계를 뜻합니다. 3x3=33의 의미는 아나로그 세계와 디지털의 세계가 합일이 되는 지점을 동시에 이야기해주며 지구촌의 현실과 유토피아가 공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과 우주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인공위성, 현실과 다른차원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은 그물망들이 상호상생합니다. 이번 설치작품은 동양사상을 근본으로 하며 불교의 "공"사상에서 무한을 가리키는 연기적 세계관에서 怒償衫チ咆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석천 궁전에는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물 코 마다 투명구술에는 우주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되며 서로서로 다른 구술에게 투영됩니다. 정신의 구술은 물질에 투영되고 물질의 구술은 정신의 구술에 투영됩니다.
시간의 구술은 공간의 구술에 공간은 시간의 구술에 투영되어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상대적인 투영을 받아들여지고 이루어집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별 개의 구술이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가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저 구술들처럼 서로서로 그 빛을 주고 받으며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죠. 그물눈 하나하나의 그 모든 구술들이 이중삼중으로 빛을 반영하고 있는 장엄한 광경을 "중중 무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무한이 투영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세계관이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많은 이론적 모델 가운데 초끈이론"(superspring theory)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언급한 "브레인(brane)이론"이 불교의 화엄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관점에서 이번작업이 그러한 뜻에 의해 설치작업으로 표면화 됩니다.
현실에서 4차원만 눈에 보이지만 우주의 11차원(초끈이론)에서 나머지 7차원은 공간에 아주 작게 접혀 있어 관측하기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러한 사실로 현실은 상상의세계(유토피아)와 공존하고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원사상을 그려봅니다..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윤회사상과, 회귀 이것은 공을 뜻하며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것, 시작과 끝이 없는 완성된 모양을 갖춥니다.
완전함을 설명 할 길이 없듯이 인간은 사회속에 억지로 저마다의 규정과 법을 만들어 놓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마치 그것이 완벽 한 것 처럼.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체재에 지배되어 고통받고 집착하듯이, 정신적인 압박이 순환되는 삶을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투명한 구슬들이 서로 투영되며 서로 무한이 관계합니다. 불교의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망의 구슬들을 미화시켜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무한이 팽창되는 우주를 표현하기 위해 전시관 사방벽면을 제법 큰거울로 메꾸고 ,천정에는 번져나가며 팽창되는 프랙탈(frectal)이미지를 프로젝터로 그빛을 쏘며 형형색색 상상의 세계와도 같은 유토피아를 그려보았습니다.
지구의 맨탈을(mental) 이끌어갈 동양사상은 모든 과학과 우주의 삼라만상의 근원이며 정신의 모체입니다.

 

사상이 이끌어갈 문화적 배경 또한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구성을 했습니다.

Critical essay

메시지 접속의 “절묘한” 방법론, 아이러니와 알레고리- 강리나의 개인전에 부쳐

시대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이 다르듯 예술의 표현에도 예술을 바라보는 눈길의 차이에 따라 현저한 변화가 있기마련이다.
감성이 앞서는 시대에 있어서는 감성의 작용이 예술표현의 내용에 앞서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과거의 전통적양식의 예술에 있어서는 그 내용과 방법이 신중하고 비교적 완결된 깊이를 요구 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그것은 오히려 표피적이고 불안정한 감성이 작업의 전면에 나선채 보다 즉흥적인 시각적 만남을 요구하게 마련이며 그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 있는 상황도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식자들은 오늘날의 예술적행위가 지나치게 경박한 무엇으로만 흐른다고 질타한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납득만할 수 있는 사정도 결코 아니다. 깊은 것만을 기준으로 할 수 없는 다양성의 시대가 우리눈앞에 펼쳐지고 있기때문이다. 비록 가볍고 표피적인 표현의 것이라도 나름의 필연성과 의미론의 뒷받침을 갖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시대의 상황을 사려있게 나타내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잠재된 내면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의미할 수 도있기때문이다.

 

이제 일방적인 기준에 의한 깊이와 선입관으로 가득찬 내용주의는 다시금 검증되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강리나의 작업은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시사를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순발력있는 표현력의 절제와 더불어 소재가 지니는 물성의 상대적인 부각을 통해 메시지의 특정한 내용을 특정한 방식으로 강조해왔던 그의 작업은 그 소재와 메시지 설정의 다양한 변화로 말미암아 언듯 혼란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을뿐더러 질료자체의 장식성과 세련미를 강조하는 조형적 어법으로 인해 내용으로 향하는 집중도도 그만큼 약화되어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리나의 작업은 그 외피적 시각의 친밀도는 물론, 그것을 뛰어넘는 메시지의 시각적 전달력에 의해 형식과 내용의 충실한 융합과정을 느끼게 하는 예사롭지않은 차원의 조형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매끄럽고 속도감있는 금속의 표면성과 더불어 속절없이 나열되는 지극히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서술적이미지로서의 낙서가 기묘하게 접속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며 이 장면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불균형의 균형감 혹은 균형감속의 불균형에 의해 어떤역설의 의미론을 강하게 인지시켜준다.
 

어쩌면 매끄럽고 세련된 외양의 이미지는 오히려 메시지 내용의 강조를 위해 위장시킨 필연적인 방법론의 전개가 아닐까 하며 그속에서 작가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때로는 환경과 생명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파시키고 있다.(그가 작업에 신소재를 많이 사용하고 연구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근자에 들어 국제적으로 첨예화되고 보도의 촛점이 되었던 미사일을 모형의 작업으로 등장시켰던 예가 바로 그것이다.
금속의 메카니컬한 표면구조를 통해 전쟁이 지니는 차겁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그속에 내재시키는 네온낙서의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정감은 미사일 본래의 파괴력을 무화시킨채 고도의 과학적 정밀도를 지니는 무기의 이미지를 하나의 희화적 대상으로 추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쟁을 위해 무한정 발전시켰던 인류의 검은 욕망을 하나의 시각적 알레고리속에서 “가볍게” 비판하면서 그 공허한 집념을 “슬쩍” 꼬집고 있는 것이다. 점멸하는 네온낙서의 기묘한 “장식적 절규”속에서 오늘날 시대가 안고있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를 그렇게 “절묘하게” 일깨워주는 작업도 사실상 드물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업적 특징이요 매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포스코 미술관에서 열릴 “둥근 금속구”의 작업은 애초의 발상적 스케일에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생겨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금속구의 물성의 강조를 통한 역설의 강조를 약화시킬 수 있는 아쉬움 (무게를 초월한듯한 큰 금속공의 반복적이고 반사적인 진열을 통한 역설)이 전제되고 있지만 작가 특유의 독특한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의 맛을 보는데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미술관이라는 실내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확장시키며 그 다양하고 기묘한 역설의 메시지를 어떻게 발생시켜 새로운 조형어법을 창출할 것인지가 몹시 기다려지는 전시회이다.

 

                                                                                                                                                          윤우학 (미술평론가)

 

 

 

1982년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허탈한 4月 어느 편집가에게서 사진집을 선물 받으면서부터 받은 충격은, 늘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인생의 지표가 되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Leni Riefenstahl”? 무용가, 영화배우, 영화 ‘베를린 올림픽’을 찍은 영화감독으로써, 나치가 망한 후에 히틀러 정권 때 베를린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로 망명의 길을 방황하던? 8년간 아프리카 Nuba족의 일상을 찍어 펴낸 <누바족의 최후 Die Nuba> 책이 있다.
그는 70이 넘어 바다 속을 찍었는데, 그때 그 책을 대할 때 느꼈던 무용가의 선과, 영화배우의 Reality, 영화감독으로서의 Creative가 한컷한컷 이루어 진 것을, 예민하게 뿌리 박혀 현대를 지켜볼 수 있었던 젊은날의 나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힘빠진 메가폰을 들고 “레디 고”를 외치는 허탈한 영혼의 영화감독을 그린 강리나의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한없이 웃었다. Nihllism의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한 6개월 뒤에 본 작품은 온통 낙서 투성이었다.? 온통 세상을 돌아다니며 낙서하고 싶단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온 세상을 낙서하고 싶을까..
 

그의 아름다움은 언급할 필요가 없이 모든 여성이면 꿈이고픈 “모델, 영화배우”……
영화배우로 대종상 연기상을 획득한 연기자이면서도 자기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수 많은 영화의 미술 진두 지휘에 이르기까지... 가히 영화예술의 귀재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그가 수학자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마치 거미줄처럼 그어대며 살아가는 그는 우주의 복합적 원리를 그녀만의 독특한 주술적 언어로 또한 Narrative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작품에 몰입하고 있다.

 

감상자가 상황의 표면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심층내용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묵시적으로 요구한다.? 다시 말해 강리나는 또 하나의 Leni Riefenstahl 로 내 안에 꽉 들어차 있다.
여기 강리나를 소개한다. 그녀의 열정, 그녀의 철학과함께……

 

                                                                                                                              2003년 6월에 엘렌킴머피

 

 

닦여진 윤기 나는 대리석 위로 금속 공이 흐르다 멈춰 있다.

금속 공 표면에 작가의 정신으로 새겨 놓은 작은 틈 사이로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와 기호의 조합이 색과 어우러져 현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메시지 속에는 아인슈타인의 과학법칙을 설명하는 기호들의 나열도 한 자리를 잡고 있겠고, 어릴 적 동네를 휘감던 실개천의 굽은 모습이 은백색의 틈사이로 붉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 강리나의 이번 전시를 머리 속에서 그려 본 전시장 구성이다.

 

작가는 초기 전시에서 예술의전당 미술관을 놀이터 삼아 장난처럼 만화를 구성했다. 전시장 벽에, 작가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수많은 단상들을 무질서하게 붙이고, 가슴속에 품었던 형형색색의 물감을 뿌리고, 그렸다.

그러나 그 부조화의 화폭에서 관람객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보았으며, 작가의 가슴속에서 깊이 절규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의 개별 인간의 고독과 삶의 절망에 대한 표현을 동감하게 되었다.

즉 작가는 작가의 주변에서 발생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격렬한 반응을 전시장에 토해 낸 것이다.

 

최근에 작가의 전시에서 보여 지는 작품세계에서 그 동안 몇 년차의 예술적 경험을 폭넓게 수용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금속과 빛의 조화를 도입하면서도 그 내용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소재에서, 오히려 인류의 평화와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뜨거운 정신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고통을 전쟁과 빈곤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전 인류의 소망으로 개인과 주변의 생명만이 아니고 우리 동시대인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며, 차가운 로켓트를 뚫고 나오는 파란 빛의 상쾌함은 전쟁의 비참함과 극복에 대한 인류의 희망을 표출한다.

 

원자탄과 같은 금속 공을 비집고 나타나는 아인슈타인의 e=mc²은 그 광채와 함께, 인류의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해야하는 에너지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을 담고 있다.

작가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료하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모두 평화와 사랑의 염원을 갖고 살자는 개인적 소망을 전달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 황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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